3300자 / 파판14_에메트셀크와 빛의 전사
일반 타입 샘플2022. 3. 7. 00:54* 칠흑의 반역자 전체를 아우르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 주세요.
끝은 고요한 것이라고, 감히 그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하데스가 손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허공을 찢는 굉음이 바다의 바닥을 울린다. 동시에 어둠의 구속을 간신히 끊어낸 여덟 개의 혼들이 시야와 정신을 좀먹는 칠흑에 먹혀들어 간다. 순수한 마력을 이 정도의 범위로 발산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마도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을 다룰 수 있는 하데스 정도나 부릴 수 있는 기적이었다. 피할 곳이 없어 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마력의 중량에 맞서 빛의 전사는 이를 악물었다. 어둠에 대적할 빛이 부족할 리는 없을 텐데. 자신이 몸담은 세계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조차 그와 모험가가 쌍둥이처럼 나누어 가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힘의 차이겠지. 빛의 전사는 자신이 결코 하데스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해도,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앎에도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걸어왔던 모험의 증명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불러온 영웅들의 에테르가 눈앞을 검은빛으로 물들이는 마도에 흩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빛의 전사는 창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온몸을 잠식하는 고통을 억누르며 그것을 하데스의 목 앞까지 들이밀어 휘둘렀다. 뼈란 뼈는 전부 부서지고 한계까지 밀어 붙여진 근육이 죄다 찢어진 몸은 이미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으나, 그 창 끝이 그리는 선만큼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무엇이라도 베어내야 했던 창날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데스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순간, 그 혼신의 일격을 재현한 듯한 마력의 결정체가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팍에 박힌다. 터져 나오는 피만이 이 흑백의 전장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는 몸이 몇 번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호흡을 멈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웅은 그가 흩뿌린 핏자국 위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승산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 했는데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면 이런 꼴불견이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느새 다시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데스가 쓰러진 빛의 전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갑주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흰 빛이 같잖았다. 결국은 그것 하나 삼키지 못할 그릇이 진실된 인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그는 자신이 지닌 어둠에 그녀의 빛이 중화될 시간까지 미리 계산해 두었으나, 설마 그녀가 그 최소한의 시간마저 버틸 수 없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데스에겐 이편이 더 나았다. 사실은 조금 유쾌하기까지 했다. 참을 수 없는 비웃음이 마모된 잇새로 터져 나왔다. 그녀가 졌다는 사실로 인해 그가 모험가를 지켜보며 행한 실험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비록 영혼이 두르고 있는 색깔은 유사하나, 그녀는 아젬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혼을 계승한 자라면 이렇게까지 한심하고 무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비록 세계를 깊게 사랑하고, 필요한 살생마저 막아 보이겠다며 무모하게 덤벼들고, 세상의 그 무엇도 자신을 묶어둘 것은 없다는 것처럼 조용하게 미소 짓는 점은 아주 닮아 있었지만. 아무리 그런 사소한 점들을 볼 때마다 그녀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들,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한 아젬은 고작 자신이 구한 것들에게 먹혀들어 갈 정도로 약한 사람이진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어떤 증명이었다. 그래서 하데스는 아무런 가책 없이 모험가를 반역자로 만들 수 있었다.
"자, 이제 눈을 감아라. 편해지는 거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세계는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진 채 고통에 떨던 빛의 전사의 어깨 위로 잔잔히 손을 내렸다.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피에 흰 체액이 섞여 심해의 바닥에 기묘한 문양을 그려나간다. 그녀의 몸이 채 갈무리하지 못한 빛이 모든 상처 사이로 새어 나와 이내 하데스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그렇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검은 갑주를 부수며 순백색의 새 육체가 태어나는 광경을 그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뚜둑거리는 불길한 소음을 내며 새하얀 손톱과 날개가 연한 살갗을 뚫고 나와 새로운 몸으로 변해간다. 고치에서의 우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인 빛은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와 하나가 되었다. 빛의 힘이 육체의 에테르를 찢는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는데, 모험가는 신음 한 번 뱉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이미 딱딱하게 변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부드러운 채로 남은 눈동자만을 움직여 하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석고처럼 굳어가는 입술을 힘겹게 끌어 올려 단어를 자아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이미 귀를 찢는 듯한 죄식자의 파열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지나치게 오래 생각했던 하데스는 불행하게도 빛의 전사의 마지막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 ―.
"……불완전한 것이 감히 화해를 바라는가. 주제를 알아라."
그렇지만 그는 모험가를 기억할 것이다. 아무리 그녀에게 구역질이 날 정도의 혐오를 느끼고, 죄식자가 되어 자신이 구원했던 것들을 전부 먹어 치울 그녀의 말로를 비웃는다고 해도 그는 아주 오래 기억할 것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바다 밑에 잠겨 썩은 일만 이천 년이 다시 흐른다고 해도 하데스가 그녀를 지워낼 수는 없으리라. 이것은 빛의 전사가 미련한 그에게 내리는 저주였다. 고대의 그 언젠가 아젬이 그에게 내렸던 것과 꼭 닮은.
모험가는 이제 바닥에 누워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데스도 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내려다봐야 했던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뒤로 젖혀도 전부를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그것은 등에서 돋아난 날개를 퍼덕이며 조용하게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밤을 찢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새로 돋은 날개를 퍼덕였다. 그리고 어두운 바다 바닥에서 솟구쳐 순식간에 지상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것은 이 별의 거짓된 주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죄를 먹으러 간다.
하데스는 그것이 날아가는 뒷모습을 쫓아 아득한 수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숙여 템페스트에 세워진 검은 도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환청이 어제의 일이었던 것처럼 선명히 들렸다. 운석의 낙하음, 수많은 혼이 명계로 몰려 지옥의 문에 금이 가는 소리, 살고자 했던 의지들이 땅을 기어가는 비명……. 끝은 미칠 것 같은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의 끝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절대 고요하지 않은 종말이 이 별에 닥치게 할 것이다. 제대로 생을 구가하지도 못하는 것들에게 우리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데스가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에 분풀이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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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0자 / 1차
일반 타입 샘플2021. 12. 24. 12:50"일 하나 같이 하자."
케이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억눌러야만 했다. 안경을 끼지 않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으나 찌그러진 미간은 펴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을 자던 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새벽 서너 시에 응당 해야 할 일 말이다. 어깨에 걸친 두꺼운 가디건의 안에는 얇은 파자마 한 겹뿐이어서 문을 오래 열고 있자니 추웠다. 어서 이런 멍청한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자러 가고 싶었다. 한숨을 깊이 내쉰 그가 결국 피곤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에스를 쏘아 보았다.
"싫습니다. 그리고 미쳤습니까? 지금이 몇 신 줄은 알고 하는 말입니까."
"글쎄, 하늘에서 떨어진 절호의 기회를 주울 시간?"
"싫다고 했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문틈에 에스의 구두 굽이 끼어 들어왔다. 케이가 좀 더 신경 써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닫히려는 문의 사이로 들어와 닫히는 것을 막았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닫으려고 했지만, 그만큼 상대도 세게 당겼다. 이 모든 상황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케이에게 나쁜 제안은 아닐 테니 들어보기나 해."
"당신과 저 사이에 나쁘지 않을 만한 제안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한테 온 거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에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기분 나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케이는 이제 문을 밀어 닫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가 해야 할 말을 나불거리는 것을 놔두기로 했다. 이럴 때의 그는 강에 던져 버려도 입술만 동동 떠서 기어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말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탓이다. 어쨌든 자신이 응하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다. 완력으로 제압할 자신도 있었다.
"간단한 호위 임무야. 지금부터 신변 정리를 좀 하러 갈 건데, 가게 될 곳이 살짝 험악한 곳이거든? 네가 따라다니면서 날 지켜 줬으면 좋겠어."
역시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기대도 안 했기에 딱히 실망도 없었다. 케이는 지금 자지 않음으로써 낭비되는 내일의 시간과 효율이 얼마일지를 계산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에스의 말을 듣는 순간 잠에 취해 반쯤 멍한 그의 정신이 순식간에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확 깨고 말았다.
"보수로는 날 죽일 권리를 줄게."
"……."
"어라라, 갑자기 무서운 눈을 하고. 갖고 싶었잖아? 아니야?"
나, 오늘 자살할 생각이거든. 가벼운 말투로 덧붙이며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그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며 케이는 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나는 말은 많았지만 그중 아무 것도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해도 전부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고른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에스가 채 하지도 못한 말의 허리를 잘랐다.
"삼십 분 정도 기다리면 충분하겠지? 근데…… 꽤 귀여운 잠옷 입고 자네, 케이."
"안에서 기다릴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가 눈꼬리를 휘며 던진 코멘트에 질린 케이는 건네려던 말을 깔끔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
새벽부터 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낡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슬럼가였다. 처음엔 얼마나 대단한 곳으로 신변정리를 하러 가길래 호위가 다 필요한가 싶었지만, 막상 하루 종일 에스를 따라 다녀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서기 전부터 악취가 풍긴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거리를 걷기 시작하니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는 곳이었다. 대도시라고 할 순 없어도 제법 신경을 써 정비했을 주변의 아파트 단지나 도심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그 폐허의 숲을, 두 사람은 말없이 헤치고 나아갔다.
목적지로 보이는 가게에 들어서려고 다가간 에스에게 갑자기 달려든 괴한을 케이가 권총으로 쏴 즉사시켰을 때에야 두 사람 사이의 묘한 침묵이 겨우 깨졌다. 둘 다 깔끔하고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어 외부인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리라. 급하게 나오느라 그의 총에는 소음기가 달려 있지 않았는데, 그 누구도 총성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시체를 치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아래로 고용주를 훑어보더니 그에게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케이는 굳이 괜찮냐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대신 불평에 가까운 질문을 흘리며 탄창을 열어 탄환을 채워 넣었다.
"이런 곳에서 정리해야 할 신변이 뭐가 있습니까."
"받은 일은 마무리해야지. 사실 저번 달까지 끝내는 일정으로 받은 건데, 어른의 사정으로 미뤄져서. 관심 있어?"
그들이 들어선 곳은 아무리 봐도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 다른 것을 거래하는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의 정육점이었다. 목 언저리에 화려한 용 문신을 한 주인장은 에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가게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태연한 동작으로 읽던 신문을 접었다. 그리고는 꾸러미에 담긴 무언가를 건네주더니 다시 읽던 것을 펼쳐 들었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이런 곳에서 하기는 부적절한 대화이겠거니와 애초에 그렇지 않더라도 큰 관심은 없었다. 케이는 재빠르게 말꼬리를 자르려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에스에게 휘둘려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정글에서 가장 유명한 사이비 종교의 차기 교주를 찾아 없애는 일이야. 굉장하다고, 그 종교. 이 일대를 전부 휘어잡아서 마약이나 인육, 장기, 검은 돈, 아무튼 밖에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의 유통량의 70% 이상을 통제하고 있어. 이런 분위기의 도시니까, 그게 어느 정도의 양이 될진 너도 대충 짐작이 가겠지? 그야말로 악의 근원!"
저놈의 주둥이. 그렇게 평할 만큼 이 허름한 성채의 주도권을 꽉 잡고 있는 집단에 대한 암살 계획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저 입술을 잘라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케이는 슬쩍 신문을 읽는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만 것인지, 미동도 없이 눈동자만을 움직여 종이 위의 활자를 읽고 있었다. 그는 에스와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추가적인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말만 들어서는 제법 까다로운 암살이 될 것 같았으나, 어찌 되었든 빨리 일을 끝내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결론적으로 케이의 추측은 틀렸다. 에스의 목적 달성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정육점에서 받은 꾸러미를 푸르자 천 사이에 아직 어린 아기가 죽은 듯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태어난 지 돌이나 됐을까 싶은 아기는 나이대에 맞지 않게 아주 고요했다. 수면제 따위에 취해 있는 것이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조금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케이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핀 에스는 곧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귀엽지? 온갖 사악을 함축 시켜 놓은 것치고는."
"……."
"그렇게까지 잡아먹을 눈으로 볼 이유 있어? 말했잖아. 이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이곳의 악의는 아래로 몸집을 불려가며 계승될 뿐이야."
"그래서 그걸 정의라고 말할 셈입니까."
"아니? 돈을 벌 좋은 기회라고 말할 생각이었지. 그냥 그렇게 말하면 네 납득이 좀 쉬울까 해서."
실행되지 않은 악을 자르고자 아직 죄 없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 정당한가. 케이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마치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에스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 아이와는 다르다. 두 사람은 너무 늦게 만났다. 서로에 대한 굳은 평가와 감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그 모든 필요 없는 정보를 나불댔다. 얕은수가 뻔히 보이는데도 케이에게는 그 수를 막을만한 재료가 없었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고요한 짜증을 누르며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쨌든 그는 정의의 사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착각한 적이 없었다.
"제 납득하고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럴려나."
애매한 답변이 끝이었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전처럼 고요해졌다. 앞서 나가는 발소리가 들릴 때까지 갈라진 벽의 틈만을 째려보던 케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에스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왔던 것과 비슷하게 빈손으로, 그가 따라오는지 아닌지도 신경 쓰지 않고 네온사인이 꺼진 미로 같은 복도를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까지 안고 있던 것은 어디로 갔지. 그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악을 짊어진 아기는 죽은 걸까?
케이는 알지 못한 채 에스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는 그들이 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 가설을 폐기했다. 무너지기 직전인 계단을 오르고, 이해할 수 없는 구조의 복도를 지나고, 몇 개의 수상한 나무 궤짝과 구더기 떼들을 건너 어느새 어두워진 옥상에 도착해 버렸다. 아직 저녁 시간인데도 하늘은 으레 겨울이 그렇듯 짙은 회색빛이었다. 채도가 다른 금빛의 머리카락들이 살을 에는 바람에 휘날려 엉망으로 얼굴을 가렸다. 둘 다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 일은 끝났어. 이제 집행의 시간이야, 케이. 날 죽이고 싶었지? 아주 오래전부터. 축하해! 오늘이야말로 네 꿈이 이뤄지는 날이야."
에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어린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 보며 내지를 법한 들뜬 목소리였다. 케이는 묵묵히 그 말에 대하여 생각했다. 죽이고 싶냐 아니냐를 따지면 전자가 맞긴 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로, 이런 곳에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승리는 언제나 하늘로 손을 뻗어 얻어내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줍는 것을 승리라고 부르는 것은 지독한 무례다. 그렇지만 어차피 행할 살해의 형태가 그리 중요한가? 결론적으로 죽일 수 있으면 이기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생각해 때와 장소를 고르며 살해를 유예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졌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냔 말이다. 그가 말을 삼키고 있자니 에스는 침묵을 나름대로 해석했는지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왜? 못 하겠어? 이렇게 죽이는 건 네가 지는 것 같아서?"
"……."
"그래, 그럴 법도 하지. 그야 난 어차피 죽을 거고, 넌 그걸 아주 조금 앞당길 뿐인 거니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목을 미리 친다고 그가 소에게 자비를 주었다고 말하진 않지. 그렇지만 이제 슬슬 인정하자. 그렇게 생각해서 네가 언제 날 죽일 수 있겠어?"
이미 너무나 많은 길을 함께 걸어왔으며, 상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둘 다 원한 적이 없는 일이었으나 이미 지나간 운명을 한탄할 만한 성격들도 아니었다. 케이는, 굴욕적이게도, 에스의 말이 또 맞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그에게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지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그에게 품는 패배감의 정체였다. 이기든 지든 승부를 내기도 전에, 승패의 조건을 알 수 없게 된 것이.
"예. 그런 것 같네요. 이제 만족하십니까?"
"하하, 그렇게 본인이 말하니 기분 이상하네! 넌 이런 기분을 평생 모르고 살 줄 알았거든. 그래도 보수는 받아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 어쨌든 나는 오늘 죽을 생각이니까."
"왜 오늘입니까?"
케이의 물음에 에스의 붉은 눈이 깜빡였다. 그리고는 눈꼬리를 휘어 기분 나쁜 미소를 짓더니, 난간이 없는 옥상의 모서리를 향해 한 발짝 더 물러섰다. 바람이 그를 삼킬 것처럼 불어 진한 금발과 올라간 입꼬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야, 내가 오늘 문득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런 거 낭만적이지 않아?"
어차피 고작 그 정도의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가 가치를 두는 많은 것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우선순위를 가지지 못했으며, 그 법칙은 반대로도 작용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케이는 그 시간들마저 이겨냈고, 어떤 순간들에서는 자신의 기준을 관철할 수 있었다.
"당신을 죽일 권리는 제 것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제가 받고 싶을 때에 받아 가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는 품에서 총을 꺼내어 심장보다 한참 아래를 쏘았다. 총알이 날아가 에스의 허벅지에 박히는 것이 발포 음이 울리는 것보다 빨랐다. 쏘는 사람이 케이였으며 이만치 가까운 거리에서 노린 것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빗나갈 리는 없다. 아, 하는 단말마와 함께 에스가 옥상 바닥에 쓰러진다. 무심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간 케이는 상처를 빠르게 훑었다. 진득하고 붉은 피가 바지를 적셔 보기 흉한 색깔로 물들이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 정도론 당장 죽지는 않는다.
"같잖은 짓을 하시는군요. 제가 당신을 죽이는 게 합당한지 아닌지 고민이라도 하길 바란 모양이죠. 굳이 그런 일을 하는 모습을 고르고 골라 보여준 것을 보아하니."
"하하……. 그렇게, 윽, 티가 났어?"
"뻔하게 군 것까지 제 속을 긁으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들켰나 보네.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는 와중에도 에스는 굳이 그런 뻔뻔함을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래도 건강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다른 사람보다 외상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질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의사에게 보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케이는 가뿐히 그를 들쳐 멨다. 질 좋은 코트의 깃과 스웨터가 더운 피로 젖어 들었다가, 초겨울의 차가운 공기에 닿아 말라가며 체온을 앗아갔다. 사람 하나만큼의 무게가 더해졌는데도 그는 힘든 티도 내지 않고 왔던 길을 돌아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등에 닿는 가쁜 숨 사이로 고통스러운 헐떡임이 섞였다.
"네가 이길 때까지, 하아……. 살려 둘, 모양이지? 케이. 초등학생이야? 자기가 이길 때까지, 계속, 게임을 계속해 달라고 하는?"
"한 발 더 맞기 싫으면 조용히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안 죽였어, 그 애. 아마 평생 자폐를 가지고,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긴 하겠지만……. 죽이진 않았어."
정말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었다. 케이가 생각하는 질서와 정의에 반하는 일을 그가 굳이 택하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 점심 식사를 하며 대충 소모할 만한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두 사람이 지겹도록 반복하는 루틴에 불과한. 그렇지만 케이는 이번 건에 한해서는 아마 다른 이유도 있을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자신이 그 아이와 에스를 겹쳐 보게 하고 싶었던 그의 시시한 계략은 합당했다. 그렇지만 그건 아마 케이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닐 터였다.
"네 입장에서 생각, 했거든. 그래서, 너도……. 날 안 죽일, 거라고. 알고 있었어."
케이는 눈동자만을 돌려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가슴팍이 기분 나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을 정한 다음 다시 앞을 보았다. 이제 곧 출구였다. 낡아빠진 탓에 반쯤은 고장이 난 싸구려 네온사인이 경첩이 떨어진 문부터 그들이 타고 온 차까지 비추고 있었다. 어느샌가 석양마저 지고 검은 땅거미가 깔린 거리를 가로질러 차로 돌아간 케이는 피투성이가 되지 않은 쪽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에스의 차 키를 찾았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뒷좌석에 그를 대충 눕혔다. 차의 시트가 더러워지겠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차 문을 닫으려다, 그는 문득 멈추고 이미 제법 피를 흘려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 에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결과는 같지만, 이유가 다릅니다."
그는 사회에 혼란과 악의를 가증시키는 범죄자를 살리거나 죽이는 것이 질서에 맞다든가 맞지 않다든가하는 논리로 에스를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런 것 따위는 에스에 한해서 아무 상관도 없어지고 만다. 마치 그만이 케이를 구성하는 질서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오늘 처음으로 그에게 마음을 읽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케이는 희미하게 이죽거렸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지을 표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생각할 거리가 생겨서 다행이네요. 병원까진 꽤 머니까."
뒷좌석의 문이 닫혔다. 에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욕지거리는 케이에게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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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타입 샘플2021. 9. 25. 01:30 "리오 사장님은 왜 저를 고용하셨나요?"
둘이서 함께 가게의 꽃들을 돌보던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에 비수가 꽂혀들었다. 그라시데아 화분 앞에 한 쪽 무릎을 굽혀 앉아 있던 리오는 나쁜 짓을 들킨 것처럼 뜨끔한 기분이었다. 고용주가 되면 주기적으로 받기 마련인 질문일 텐데도 괜히 아노네의 입술을 타고 나오면 마치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평소에도 곧잘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말을 해서일까. 대답을 고민하며 잠깐 시선을 굴리던 리오는 꼬부기 물뿌리개의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다음 화분으로 넘어갔다. 그는 이번에도 한 번은 도망쳐 보기로 했다.
"음, 그러니까……. 곧 체리꼬 축제 시즌이잖아요. 이런저런 축제가 있을 때엔 경단이 많이 팔리거든요. 작년까지는 포장이나 배송을 도와줄 포켓몬을 잠깐 고용했는데, 올해부터는 반대로 해볼까 싶어서……."
"제가 물어본 건 그쪽이 아니에요."
얼마 가지도 못해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덜미를 잡혔다. 왜, 라는 질문의 방점이 '고용'이 아니라 '저'에 찍혀 있다는 것을 리오도 모르지 않았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자신을 선택했냐는 답변에 현명한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상대가 누구라도 그럴텐데, 하물며 아노네라면 더 심했다. 그녀의 미묘하게 나무라는 듯한 말투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리오가 근 이 주간 보아온 아노네에 대해 말해 보자면 이랬다. 늘 차분하게 움직이지만, 동시에 갑자기 어디까지고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 발걸음을 디디곤 한다. 건네는 말은 사려 깊고 부드러운 것뿐이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가끔 부드러운 선으로 감겨있는 눈을 떠서 자신을 빤히 바라볼 때면, 그는 마치 그녀에게 심장의 내부까지 관찰을 당하는 기분이 되곤 했다. 분명 나이는 자신보다 어릴 텐데도 그녀의 생각을 전혀 짚을 수가 없었다. 가끔 그녀가 건네는 이런 곤란한 질문을 듣고 있자면, 사실 이력서에 적어 낸 나이나 인적사항도 전부 거짓말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만족할만한 답을 내놓을 자신은 당연히 없었다. 그가 느낀 모든 것이 사실에 기반한 감상임에도 불구하고 리오는 아노네가 꽤 마음에 들었고, 가능한 만큼 오래 보고 싶었다. 그러니 허튼 표현을 선택해 괜히 빈축을 사는 일은 사양이었다.
"화분 위치나 가격을 외우는 게 엄청 빨랐잖아요."
"그렇게 큰 가게도 아닌데, 대부분의 분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화관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가게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꽃이라면 풀 포켓몬 분들은 모두 각자의 것을 가지고 다니시지 않나요?"
아노네는 리오가 무난한 이유를 댈 때마다 꼭 그 정도로 무난한 대답을 돌려주며 가위를 든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말라 비틀어진 잎이나 좋지 않은 자리에 난 꽃봉오리들이 힘없이 떨어졌다. 자신의 말도 가위처럼 다룰 줄 아는 소녀였다.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허례허식을 잘라내는 것이 그녀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고 우아한지.
더 이상 지어낼 만한 이유가 없어진 리오가 아하하, 하고 멋쩍은 듯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윗쪽에 차곡차곡 쌓아둔 논리적인 말이 동나버렸다. 할 수 없이 안쪽에 숨겨둔 조금은 유치한 진심을 꺼내며 그는 쑥스러운 듯이 자신의 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진짜 마지막인데……. 가게에 처음 들어왔을 때, 아노네 양이 꽃을 보면서 한 번 웃었거든요. 그냥 그게 좋았어요."
누구든지 꽃을 보면 웃지 않을까요?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한 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래도 늘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눈꼬리가 평소보다도 조금 내려가 보인 것은 착각일까. 그 웃음의 의미를 잴 수 없어 오히려 당황한 것은 리오였다. 이 대답은 넘어가고, 그 전의 대답들은 쳐낸 것의 기준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해져 있는 그를 둔 채 그녀는 사뿐하게 걸어 가게 뒷편의 휴게실로 사라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아, 응, 그럼요. 얼마든지요."
"고마워요."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그는 벙 찐 표정으로 방금의 미소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물뿌리개에 물이 사라질 때까지. 아주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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